이사는 갑작스러웠다. 엄마는 물었다.
 "엄마는 시골에 내려가 지내기로 마음먹었어. 아빠는 도시에 남겠대. 너는 어떻게 할래?” 
 원치 않았던, 예상치 못했던 환경에 놓이면서 낯설고 불안한 시선으로 시골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나에게 시골은 오롯이 ‘리틀 포레스트’ 이지 않다. 불안을 품은 낡고 거대한 정원이다. 고즈넉하고 전원적인 것보단 무력하고 구저분한 것을 눈에 새긴다. 정리되지 않고 방치된 것들이 풍경 가운데 불뚝불뚝 튀어나와 있다. 정제되지 않은 기이한 선과 색을 유심히 바라본다. 도시와는 다른 느낌의 복잡함과 조잡함에 주목하게 된다. 그리곤 아름답고 찬란하다고 여기기도 한다. 마을 곳곳을 다니며 기묘한 판타지를 발견하고 만들어낸다.
 시골은 그런 공간이다. 평화로운 듯 보이지만 언젠가 소멸을 맞이하게 될 위태로운 공간. 도시에서 품을 수 없는 것을 넓은 땅, 한적한 공간이라는 이유로 모든 것이 있기도, 또 아무것도 없기도 한 장소. 마을은 사라지더라도 저 구저분한 것들은 언제 까지고 남아있겠다 싶다. 모든 것이, 때로는 불필요하다고 여겨지는 것까지 모두 다 땅 위에 솟아 있다. 문명의 파편은 조화롭기보단 용도에 의해 구성되고 변형 되어 흩어져 산재 되어있다. 자연을 향한 인간의 부조리는 우스꽝스러운 장면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영원히 방치된 웃기지도 않은 농담 같다. 그것은 거대하면서도 초라하다. 폭력이 되고 코미디가 된다. 풍경을 연극의 한 장면인 것처럼 받아들인다. 사람들을 어떤 캐릭터로 만들어낸다. 사람들은 풍경을 그대로 수용하고 살아간다. 밥을 먹고 빨래를 널기도 한다. 기이함 속에 삶은 계속된다. 풍경 역시 사람의 것을 그대로 흡수하고 자생하며 천천히 흘러간다. 농부는 풍경을 모른다고 했다. 지독하게 현실적인 것은 어쩌면 초현실이 될지도 모른다.
 나는 도시와 시골을 오간다. 분리된 세상, 점점 멀어지는 두 은하를 왕래하는 느낌이다. 두 세계가 영원히 멀어져 서로에게 도달할 수 없는 작은 불빛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을 염려한다. 내가 알고 있는 시골은 이미 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시골은 도시의 또 다른 모습일 뿐이다. 우리는 시골에 빚지며 살아간다는 누군가의 말을 떠올리며, 시골을 갈 때마다 겪는 낯선 감정의 이유를 쫓는다. 시골을 보고 있으면 도시가 떠오른다. 자연스레 도시와 시골을 이분하여 바라보게 된다. 시대의 관심사에서 벗어나 물리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가장자리에 선 시골의 모습을 통해 두 공간의 불균형을 비교한다. 시골은 스스로 고립 되었고, 도시는 계속해서 가속하고 팽창한다.
거기엔 그들이 없었다.  
김성우(큐레이터, 프라이머리 프랙티스 디렉터)
녹색 찬연한 숲, 밭, 그리고 비닐하우스까지. 시야를 가리는 고층빌딩 없이 널리 열린 풍경이 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딘가 기괴하고 낯설다. 수풀 사이로 화면 밖 촬영자를 응시하는 인물, 수풀과 밭 사이로 들어선 인공 구조물과 부서진 돌, 푸르렀던 계절이 지난 수목들이 풍기는 을씨년스러운 모습들. 질서와는 동떨어진 체계로 이루어진 모습들이다. 더 정확히는 질서로 이해하던 익숙한 ‘전형적’ 이미지로부터 거리를 둠으로 가능해진 삶의 현실적 모습이라 할 수 있겠다.
이는 김민준의 <엣지가든>연작을 마주하며 느낀 인상이다. 그것은 분명 시골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시골’이라는 전형적인 이미지에 부합하지 않는 어긋남을 가지고 있다. 그의 작업은 전원 풍경의 고요함, 도시에서 느낄 수 없는 평화로움과는 다소 동떨어져 오히려 그간 우리가 부여해 온 시골의 이미지에 작은 균열을 내는 이미지라고도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산만함, 기이함, 기존 개념의 균열로부터 발견하게 되는 낯섦의 장면들과 같다. 오히려 시골이란 공간에 그것의 전형성을 흐트러뜨리며 들어선 정제되지 않은 선과 형, 조화롭지 못한 색들의 끝에서 시골이란 이름에 부과된 일종의 “판타지”[1]를 목격하게 한다. 
사진은 기록인 동시에, 현실의 복제가 아닌 현실에 대한 특정한 해석을 제공한다. 그러므로 이때의 기록은 부재의 증거가 아니라, 특정한 현실을 강조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마치 이데올로기와 같이 우리의 이해를 형성해 낸다. 마치 그것은 현실과의 연결을 잃어버리고, 그 자체로 새로운 현실을 창조해 내듯 말이다. 작가가 말하는 ‘판타지’는 ‘이미지가 현실을 대체하고, 재현과 실재의 관계가 역전됨으로 더 이상 모사할 실재가 없어진 이 하이퍼리얼리티[2]의 세계 속에서 이미지를 다시 현실과 포개 놓는 일과 같다.
미디어가 양산한 시골의 이미지는 도시(화)의 욕망과 부재를 비추는 거울 이미지이다. 그것은 근대화의 눈부신 성장과 속도를 증명하려는 화려한 도시에서의 삶에서 결여된 휴식과 멈춤을 제공하기 위해 재현된 공간-이미지이다. 사실, 시골은 끝없이 범위를 넓혀가는 도시화의 잠재적 대상, 혹은 그 리스트로부터 누락되어 소멸할 예정인 장소와 공동체의 임시적 이미지 체계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 개발된 이미지는 실재 시골이라는 이름을 공유하는, 하지만 특정 공동체와 그들 삶의 양식을 유실한, 도시의 욕망이 생산해 낸 기표로 전락한다.
김민준은 이 ‘시골’이라는 ‘공간’에 누락된 ‘장소’적 이미지를 덧댄다. 이-푸 투안Yi-Fu Tuan에 따르면 공간은 장소보다 추상적인 성격을 지닌다. 특수화되지 않은 이 공간은 인간과 내밀한 관계 맺기를 통해 가치를 획득하며 장소로 변모한다. 그런 면에서 장소는 현실성(actuality)과도 관련된다. 즉, 인간 경험이 총체적인 생활 속에서 모든 감각을 통해 이루어질 때, 장소는 구체적인 현실성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작가의 사진에는 실체 없는 표피적인 풍경의 이미지 너머 삶으로 생동하는 모종의 시간이 존재한다. 매스미디어가 양산한 질서정연한 풍경으로서의 이상향, 혹은 안식처가 아닌, 두서없이 혼란스러운 하지만 따뜻한 온기로 충만한 삶의 시간이다. 그러므로 <엣지가든>은 단순히 도시와 대립항을 이룸으로 역할을 다하는 공간-시골이 아닌, 도시와 시골이라는 이항 대립을 잇고 또 가로지르며 재현된 이미지 아래, 혹은 너머 삶이 실천되는 무질서와 욕망의 장소를 가시화한다.
앞서 말했듯이 때때로 이미지는 현실에서 결여된 것들의 증거이다. 그리고 부재에 대한 욕망이 투사된 이미지에 우리의 인식은 무의식 중에 잠식된다. 그렇게 현실은 재구성되고, 더 나아가 왜곡된다. 흥미로운 것은 사진가로서 김민준은 보이는 것을 기록함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이끌어내고자 한다고 말한다. 그는 무심한 듯 배회하면서 사건을 관측, 기록하는 존재로서 일상의 한가운데서 (비)사건적 장면을 포착한다. 그렇게 자연과 문명이 충돌하고, 파편적으로 흩어진 이야기를 수집, 추적, 재구성한 풍경은 전형적 일상에서 비범한 삶의 서사를 가시화하며 정동적 순간을 촉발한다. 재현된 이미지, 그 결여로 충만한 표피적 시각성에서 벗어나 무질서한, 그래서 자연스러운 삶의 양태를 발견할 수 있게 된다.
[1]김민준은 거주지를 도시에서 시골로 이동한 후, 도시와는 다른 시골의 모습에서 아름다움과 조잡함의 양가적인 인상을 동시에 느끼며, 이를 일종의 판타지로 언급한다.
[2]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소비사회로서의 현대에 모사 된 이미지가 현실을 대체하는 시뮬라시옹 이론을 제기한다. 이는 실재가 실재하는 것이 아닌 파생실재로 전화되는 것이다. 우리는 모든 실재의 인위적 대체물인‘시뮬라크라’의 미혹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처럼 가상 실재가 실재를 지배하고, 대체하며, 재현과 실재의 관계가 역전됨으로 더이상 모사할 실재가 없어진 시뮬라크라들은 실재보다 더 실재 같은 하이퍼리얼리티를 생산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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